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제2차 포에니 전쟁 (문단 편집) == 기원전 214년 == 이러는 동안 그 해가 다 지나갔고, 로마에서는 공직 선거가 열렸다. 집정관 퀸투스 파비우스 막시무스(파비우스 전략의 주창자)가 해당 선거를 주관하기 위해 로마를 방문했다. 이때 선거에서 법무관 티투스 옥타킬리우스(Titus Otacilius)와 마르쿠스 레길리우스(Marcus Aemilius Regillus)가 집정관에 당선되었는데, 갑자기 파비우스가 이 결과를 두고 반대 연설을 시작했다. 옥타킬리우스는 파비우스의 처동생의 남편이었는데, 파비우스는 옥타킬리우스가 자신의 인척임에도 불구하고 그에게 집정관 자격이 없다고 질책한 것이었다. 당선된 법무관 옥타킬리우스는 그 해의 시칠리아 담당 해군의 총사령관이었는데, 해당 업무는 카르타고 본국에서 한니발에게 보내는 보급을 저지하고, 이탈리아 반도 전체의 해안을 경비하며, 북아프리카의 해안을 약탈하는 임무를 맡은 중책이었다. 그런데 [[1승만 하라고 스막 시발들아|그 해에 카르타고 해군은 군대를 사르데냐 섬에 상륙시켰으며, 한니발에게 누미디아 기병과 코끼리를 보급했고,]][* 사실상 한니발이 제2차 포에니 전쟁에서 거의 유일하게 본국으로부터 보급받는데 성공한 사례였다.] 북아프리카의 해변 도시들은 그다지 약탈을 당하지 않은 것이었다. 파비우스는 이런 시기에는 한니발을 상대할 수 있는 사령관을 집정관에 당선시켜야 하는데 옥타킬리우스로는 안 된다고 말했다. 또한, 다른 집정관 당선자인 레길리우스는 마르스 신전의 제관이므로 사령관에 걸맞지 않다고 말한 뒤 재투표를 명령했다. 이를 들은 옥타킬리우스는 분노해 파비우스가 집정관을 또 하려고 수작을 부린다고 외쳤으나 파비우스는 [[릭토르]]를 시켜 그를 현장에서 쫓아버리고 재투표를 감행했다. 로마 민중은 파비우스 막시무스를 다시 집정관에 선출했고, 다른 집정관으로는 마르켈루스를 선출했다. 옥타킬리우스는 법무관에 선출되었고 명예회복을 하라는 의도인지는 몰라도 다시 해군 총사령관 임무를 맡게 되었다. 그 뒤 파비우스는 로마 원로원과 군대를 얼마나 편성할 것인지 토의에 부쳤다. 여기서 로마 원로원은 과감한 결정을 내리는데, 그 해에 무려 18개 군단과 150개의 전함을 투입하기로 한 것이었다. 군단은 다음과 같이 배분되었다. 각 집정관이 2개씩 이끌고, 시칠리아 섬, 사르데냐 섬, 갈리아에 2개씩 모두 10개 군단이 투입되며, 임기가 완료되는 집정관 그라쿠스의 2개 군단, 아풀리아에 2개 군단을 남기고 피케눔에 있는 칸나이 전투 당시의 사령관 바로와 마케도니아 견제 임무를 받은 법무관이 1개씩, 그리고 2개 군단은 로마시를 수비하기 위해 남긴 것이었다. 이 계산에는 히스파니아에 있는 스키피오 형제의 군단이 제외되어 있는데, 이를 합치면 모두 20개가 넘어가는 군단이 투입되는 것이었다. 동맹시 군단, 그리고 전함의 선원들을 포함하면 모두 250,000명의 대군에 해당하는 엄청난 물량이었다. 이 물량을 맞추기 위해 새로 건조되는 전함이 많았는데 이 전함에 선원을 제공하기 위해 원로원은 인구조사에 등록된 시민들의 재산별로 등급을 나눠 많은 순서대로 7명, 5명, 3명, 1명씩 사비로 무장해서 제공할 것을 명령했고, 원로원 의원들은 각자 8명씩 제공하기로 합의했다. 로마가 대군을 편성했다는 소식은 카푸아 시민을 공포에 떨게 했다. 이들이 아풀리아에 있는 한니발에게 사정하자 한니발은 곧장 북상하여, 카푸아의 뒷산인 티파타 산에 진영을 꾸렸다. 로마는 대군을 편성한데다가 두 집정관인 파비우스와 마르켈루스가 모두 카푸아 근처에 주둔하는 중이었으나 여전히 한니발 직속부대와의 전투를 피했고, 이윽고 한니발은 병사를 이끌어 유명 명소에 제사를 지내러 떠났다. 이때 타렌툼 출신의 젊은 귀족 5명이 한니발을 방문했다. 이들 중 몇 명은 트라시메노 호수의 전투와 칸나이 전투에서 생포당했다가 풀려난 장교들이었는데 풀어주면서 한니발이 보인 호의에 감동한 청년들이었다. 이들은 타렌툼의 젊은 귀족과 평민들은 한니발을 지지한다고 하며 한니발이 군대와 함께 타렌툼 근처로 오면 타렌툼은 한니발 편으로 돌아설 것이라고 말했다. 한니발은 그들을 치하하고 자신에게 협조한 대가로 그들의 정치적 야망을 성취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한 뒤, 적당한 시기에 타렌툼으로 이동하겠다고 약속했다. 이때 놀라 시민이 다시 와서 한니발에게 내통을 약속하며 공격해달라고 청했다. 한니발은 그들을 만난 뒤 푸테올리라는 도시를 공격했는데 6,000명의 로마군 수비대가 또다시 한니발군의 공격을 막아냈다.[* 한니발이 정예병의 손실을 꺼렸거나, 보조병의 전투력이 로마군의 상대가 못되었는지 이탈리아 반도에서의 한니발의 공성전 승률은 매우 좋지 않았다. 로마가 전쟁 내내 상대하지 못할 정도로 강하다는 평가를 받던 직속부대로도 푸테올리와 같은 작은 도시도 함락시키 못한 것은 주목할 만 하다.] 이후 한니발은 놀라로 이동하여 그 해에 선출된 집정관 마르켈루스와 교전을 벌였으나 이번에도 승리를 거두지 못했다. 마르켈루스는 기병을 가이우스 클라우디우스 네로에게 맡겨 교전 중 한니발의 배후를 치도록 명령했으나 네로는 타이밍을 놓쳐 급습하는 데 실패해 마르켈루스의 심한 질책을 받았다.('''[[3차 놀라 공방전]]''') 한편 전직 집정관 그라쿠스는 노예로 이루어진 군단병을 이끌고 베네벤툼으로 이동했으며, 북상하는 한노군과 교전을 벌였다. 승리의 대가로 해방을 약속받은 노예 군단병의 사기는 높았고, 한노군을 격파했다. 이 승리의 대가로 노예 병사들은 모두 자유 시민이라는 직위를 얻었다. 이때 한노군은 2,000명을 제외한 나머지가 전멸했다고 전해지는데, 얼마 안 있어 로크리에서 한노군이 다시 활동하는 것을 고려하면 로마의 역사가들이 그라쿠스의 전공을 부풀렸다는 의혹이 있다.('''[[1차 베네벤툼 전투]]''') 로마에서는 원로원의 감찰관이 인구조사를 통해 4년간 명확한 사유 없이 군 복무를 하지 않은 시민의 수를 조사했고, 여기서 잡힌 2,000명의 시민들과 칸나이 전투 후 다른 나라로 도망가야한다고 말한 자들을 모두 잡아 시칠리아 섬의 칸나이 전투 패잔병 출신 군단에 보내 전쟁이 끝날 때까지 복무하라는 형벌을 내렸다. 로마 시민들은 신전 봉사를 무상으로 하겠다고 했으며, 그라쿠스가 해방시킨 노예 병사들의 주인들은 보상금을 전쟁이 끝난 뒤에 내어달라고 했다. 또한 고아와 과부를 위한 신용 기금이 만들어졌고, 기병과 백인대장들은 봉급을 받지 않겠다고 했다. 집정관 파비우스는 카실리눔을 공격했다. 카실리눔에는 한니발이 남긴 2,700명의 수비대가 있었기에 파비우스의 군단병으로는 점령이 불가능해 놀라에 있는 집정관 마르켈루스를 불렀다. 두 집정관이 이끄는 4개 군단병은 카실리눔을 점령했고 파비우스는 삼니움 지역으로 가서 약탈과 점령을 시작했으며, 마르켈루스는 놀라로 돌아가 그동안에 걸린 질병을 치료했다. 이때 한니발은 캄파니아를 떠나 타렌툼으로 이동했다. 타렌툼 근처에 주둔하면서 타렌툼 시민들의 사절을 기다렸으나 타렌툼에서는 아무런 움직임이 없었다. 로마의 전직 법무관 마르쿠스 발레리우스가 1개 군단을 받아 마케도니아를 견제하는 임무를 수행하고 있었는데 이 법무관이 타렌톰에 휘하 장교인 마르쿠스 리비우스를 파견해 대비를 굳게 했기 때문이었다. 리비우스는 병사들로 하여금 시민들을 철저히 감시하게 하고, 성벽의 경비를 밤낮으로 감시해 도시의 수상한 움직임을 예방했다. 며칠간 헛되이 기다린 한니발은 분통을 터뜨린 뒤 북상해 아풀리아의 경계선 지역으로 이동한 뒤 그 지역을 약탈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